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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4. 적응을 위한 그리기
    사는 이야기/Sing-Life 2021. 3. 5. 13:37

    싱가포르에서 다시 한국으로, 그때가 올 1월 말이었는데 벌써 3월이다. 아이들은 새 학교와 새 동네가 아직은 어색하지만 설레이고 기대되는 마음이 큰 것 같다. 

    싱가포르에서 우리 가족보다 먼저 출발한 짐들이 2월 중순 경 도착을 했고, 2주가 지나서야 덩그러니 네 식구 뿐이어서 황량 했던 지금 집은 사람 사는 공간으로 꽉 채워진 느낌이다.  사람 사는 느낌이란 게 사람과 물건과 함께 있어야 풍길 수 있다니...

    그나저나 짐 정리의 가장 큰 난관은 그동안 내가 그린 그림들, 그리고 미술 용품들.

    지금 새로 얻은 이 집은 면적도 그 전들 집 보다 작고 수납 공간도 부족하다. 이삿짐 박스를 풀면서 물감과 캔버스, 붓, 이런 저런 그리기 용품들을 이렇게 많이 사 모았나 싶을 정도이고, 그간 그려둔 그림들을 바라보며 이 아이들을 계속 품고 있어야 하는지 의문도 들었다. 허허, 사람이 이렇게 이기적이고 금방 잊는다. 싱가포르에서 이 아이들을 그려낸 덕분에 낯선 공간을 적응했는데 말이다. 그렇게 고마운 그림들인데 말이다. 

    2018년 8월 초 싱가포르에 도착 후 한달여간은 정말 정신이 없었다. 언어도 통하지 않는데 아이들 학교는 보내야 했고, 아는 이 하나 없는 낯선 곳에서 적응하려니 겁부터 덜컥 났다. 돌이켜보면 어쩔 수 없이 겪어야 할 고생이었지만 그때문에 기대고 쉴 곳을 더 없이 원했던 것 같다.

    싱가포르 맘 카페를 검색하다가 이제 막 가정에서 소규모로 그림 수업을 시작 한다는 글을 접했다. 쪽지로 선생님과 연락을 주고받고, 처음으로  집에서 MRT로 한시간 가량 떨어진 곳으로 마치 여행하는 기분을 가지고 나섰다. 

    첫날엔 길을 몰라서 MRT 역에서 나와 무지하게 해맸다. Beauty World 역에서 내려 걸어 10분 거리에 선생님 댁이 있기에, 땡볕이지만 호기롭게 걸어볼까 길을 나섰는데.... 걸어도 선생님 댁이 나오지 않았던 것. 아뿔싸, 나는 지도에서 제시한 길의 정반대로 향하여 걸어 갔던 것이다.

    익을 듯한 날씨에 뛰다 시피 길을 틀어 걸었다. 약속시간보다 한참 지나 선생님댁에 도착하였고 함께 할 분들과도 땀에 푹 절은 채 첫 인사를 나눴었다. 그때 쿵쿵쿵 가쁘게 뛰던 심장소리, 헉헉 거림이 아직도 귀에 웅웅 울리는 듯 하다. 

    긴장과 땀으로 범벅된 첫 방문 이후, 일주일에 한번씩, 한국에 돌아오기 전 까지 Bukit Timah 선생님 댁에서 아크릴화를 그렸다.

    콘도에서 만난 고양이들도 그리고,

    Labrador Park, 앉아서 바다를 바라 보던 장소도 그려보고. 

    집 앞 낮은 언덕, 즐겨가던 Mount Faber 산책로 등...

     

    낯선 곳이지만 눈에 들어왔던 곳을 관찰하며 그리다보니 처음엔 싫은 것 투성일 뿐이던 싱가포르 삶이 점차 안정되기 시작됐다. 

    그림 수업에서 만난 분들과의 맛난 식사와 대화들이 나의 낯선곳에 대한 두려움을 더 없이 빨리 가라앉게 해줬다. 

    1년여간 아크릴화를 꾸준히 그리다가 유화를 전문적으로 하는 학원을 한곳 더 등록했다.

    그곳은 싱가포르에서 6년 간 학생대상 입시미술을 교육하는 곳으로 성인취미반을 오전에 개설해서 운영하고 있었다. MRT역으로 Bugis와 Rocher의 가운데 정도에 위치해 있다. 그 주변으로 싱가포르의 아트 스쿨 (NAFA, SOTA, LASALLE)들이 자리잡고 있다. 매주 수요일 오전시간에 학원으로 향하며 지나치는 대학생들의 젊은 기를 받곤 했다. 왠지 나 역시 학생이 되는 기분으로 말이다. 

    역시나 새로이 만난 분들과 그림을 그리며 이야기를 나누고 식사를 함께 하는 과정에서 만끽하는... 안정감 그 이상!

    계속 싱가포르에서 살며 함께 그림 그리고 싶은 마음이 들어앉았다. 물론, 소원대로 되진 않았지만... ㅎㅎ 

     

    예상보다 일찍 한국으로 돌아오게 되면서 함께 그림을 그린 분들과도 바쁘게 이별을 하게 되었다.

    함께 그림을 그렸던 동지애(!) 때문인지, 나는 나와 함께 그림을 그렸던 분들, 또 그 분들이 채워주고 있었던 두 공간의 작업실이 싱가포르를 떠올렸을 때 제일 먼저 떠오른다. 

    예나 지금이나 나란 사람은 어디서나 적응을 할 수 있고 단체생활에 잘 흡수 되는 사람은 아니다. 

    머릿속에 생각해 둔 말은 늘 쉽게 나오질 않는다. 혹여 일이 잘못될까 봐, 망칠까 봐 , 꼬일까 봐 행동으로 옮기는 것도 굼뜬 그런 사람이다. 나를 표현하는 것이 쉽지 않아 싱가포르에 처음 갔을 때 기겁한 상태, 겁먹은 상태로 3년을 보낼것만 같아 몸도 마음도 깊게 가라 앉아 있었다. 절박함, 가라앉아 있던 그 곳 한 켠에 있던 그것이 나에게 낯선 땅에서 그림을 그리러 가라고, 찾아보라고 쿡쿡 심장을 찔러 댔던 것 같다. 

    누구에게나 그런 것이 하나씩 있을거라 생각한다.

    자신만의 에너지를 찾을 수 있게, 밖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하는 바로 그것.

    나에겐 그것이 그림이었던 것 같다. 나를 적응하게 하는 힘, 버틸 힘을 마련해 주는 에너지, 그리고 사람들과 이어주는 끈 같은 것.

    싱가포르 화실에서 만난 어떤 이들은 나보다 먼저 한국으로 돌아갔고, 다른 이들로 그분들 자리가 채워 졌었다. 그리고 지금 내가 있던 자리엔 다른 이가 앉아 그림을 그릴 것이다. 그림을 그리는 이유는 다양하겠지만, 어찌됐든 그림이란 관심사로 만난 이들이기에 즐거운 에너지를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며 싱가포르의 추억을 쌓아 올릴 것이다. 나 역시 감사히 많이 받고 누렸덨 것 처럼 말이다.

    만약 낯선 곳에 또 가게 된다면 나는 싱가포르에서의 그 때처럼 그림 그릴 곳을 무엇보다 먼저 찾으러 갈 것이다. 

    (그나저나, 저 그림들을 아름답게 둘 장소가 시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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