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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안 <입춘>나의 서재/시 담기 2020. 2. 27. 11:27
<입 춘>
김 안
이념도 없고 분노도 없는 계절이 왔다. 마음이 질겨서 봄이다. 이제 나는 한 줄로도 만족하게 되었다. 한 줄만큼의 어리석음이면 족하다. 그 정도의 망신이면 족하다. 부끄러워서 봄이다.
까마득한 크레인 위에서 겨우내 사람들이 얼어갔고, 젊은 청년들이 자꾸 죽었지만, 친하지도 않은 이들과 어깨 겯지르고 같이 취해 나뒹굴며 황망하게 흘러 다니다 보니 남편이 되었고 아빠가 되었고 사무실에 앉아 버려져 가는 반쪽짜리 노동이 되었다.
나는 버려지기가 무서운 것일까. 그래서 착한 척이나 하는 것일까, 하다가
그저 밤 늦도록 취하게 좋으니 봄이다. 가끔 술에 취해 전화하는, 지금은 꽤 잘산다는 친구를 생각한다. 그 친구의 꿈은 아직 시인일까? 내가 생각한 것은 이따위 것이 아니었다. 나나 그 친구나 포즈만을 꿈꾸었구나.
어리석어도 발랄하니 봄이다. 더더 취하고 추하고 발랄해지자. 취해 더러워지니 봄이다. 부풀어 오르는 것은 꽃봉오리만이 아니다. 흘러내리는 것은 마음의 고름만이 아니다.
발랄하게 터져버리는, 뿌리는 겨울에 둔 채 피어난 섣달 홍매화처럼
봄이 오면
부끄러움 없는 생활이
술에 취해 급작스레 네게 전화하리라.
선뜻 더러워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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