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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읽고
    나의 서재/독서 후기 2020. 11. 6. 10:07

    나는 가끔 사람들과의 만남 후 집에 돌아와선 내가 사용한 어휘나 행동 중에 사람들에게 상처가 될만한 게 없었나 반성하곤 한다. 혹여, 그런 게 있었다고 판단되면 혼자 속앓이를 끙끙하며 속상해 한다. 이런 죄책감이 나의 안식을 위해서 일수도 있겠고, 다른 사람에게 상처와 아픔을 준것에 대한 미안함 때문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두 가지 다 어찌 되었든 우리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에 타인과 나의 관계맺음에서 따라오는 자연스러운 공생의 증명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된다. 

    지금 세계 여기저기서 터져나오는 테러, 살상, 인종차별, 그리고 과거에 행한 국가적 만행을 반성하지 않는 태도 등을 뉴스에서 접하다 보면 사람 안에 미움이 이렇게 가득했나 생각이 든다. 나 같이 말 한마디 실수에 밤 잠 못이루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뭉터기로 있는 건지. 뉴스에서 접하는 좋지 못한 소식들과 사람들을 보면서 타인에게 엄청난 폭력과 죽음을 가하는 이들의 마음속 미움과 분노, 슬픔의 크기를 가늠하다 보면 끝없이 안타깝다.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나치의 유대인 학살은 미움과 고통, 슬픔의 거대한 덩어리가 잔혹한 방법으로 표출된 인류 최대비극이라고 나는 여긴다. 경제파탄으로 어렵게 살던 평범한 독일국민의 슬픔을 이용하여 유대인에 대한 왜곡된 미움을 부추긴 뒤 전 세계인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킨 히틀러는 미움-분노-화의 덩어리, 인류에겐 악 자체였다. 그렇다면 나치에 충성을 다했던 사람들의 마음의 본질 역시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히틀러와 같은 악인이었을까?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읽으며 응집된 미움과 슬픔, 분노 없어도 사람은 악에 동조하고 따를 수 있음을 나는 알게 되었다. 심지어 2차 세계대전 당시 유대인 집단에 우호감을 가지고 있더라도 나치의 명령과 악한 결정에 따를 수 있음을 말이다. 

    아이히만의 성장과정은 평범했다. 평범한 가정, 가끔은 경제적으로 휘청거려 가난했던 경험도 있긴 했지만 거리의 소년으로 내몰린 유년기는 없었다. 그의 부모는 학교 교육을 꾸준히 시켜보려 했던 것 같지만, 그는 학업에 그닥 관심이 없어 고등학교 과정은 다 마치지 못했다. 주변의 도움으로 직장 생활을 그럭저럭 해 나갔다. 적령기에 식을 치루고 시작한 결혼생활도 큰 부침없이 이어 나갔다. 그가 나치에 입당하게 된 계기는 급여가 안정적으로 넉넉하게 나온다는 친구의 이야기를 듣고 난 후이다. 그는 나치의 사상, 윤리, 직업적 고민없이 먹고 살기 위한 방편으로 발을 들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점차 거세지는 폭력, 그것도 한 인종에 대한 자비없는 멸종을 목표로 한 학살을 지근거리에서 바라보면서도 그는 나치스에 왜 잔류하며 더욱 열심히 일하는 '유대인 이송 전문가'라는 작은 톱니 바퀴가 되어버렸다.

    전쟁이 끝나고 아르헨티나에서 시온주의 비밀경찰에 이끌려 이스라엘 법정에 서게 된 아이히만은 유대인에 대한 미움이 자신에게 없었으며, 그저 직업 군인으로서 열심히 일할 수 밖에 없었음을 강조하고 자신의 무죄를 주장했다. 그리고 그는 나치에 협력하여 유대인 이송을 돕는 유대인 위원회가 있음을 폭로하며 유대인 사회를 충격으로 빠트리는데, 나는 그 대목에서 아이히만과 나치에 협력한 유대인 위회원의 색이 같다고 인식하게 되었다.

    그들의 동기는 '미움'이 아니었다. '성취'와 '권력'의 유지, 그것을 위해서 그들은 나치의 유대인 학살에 가담한 것으로 여겨졌다. 그것들은 타인과의 감정적 교류, 연민, 그리고 사랑을 증발시킬 수 있는 것이라는 것도 말이다. 놀랍게도 그들 모두 겉으로는 '악'으로 '미움'으로 똘똘 뭉친 그런 사람들이 아닌, 마치 내 이웃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배경도 삶도 모두 평범한 사람들이었다는 것이다. 

    사람을 사람과 연결시켜주는 것은 타인과의 공감능력인데, 사랑이 결여된 성취욕은 우리를 타인의 상처와 고통을 볼 수 없는 장님으로 만든다. 그리고 극단적으로 거대한 전쟁을, 그 안에서 인류학살에 작지만 결정적인 톱니바퀴의 역할을 할 수 있음에 난 오싹했다. 

    한나 아렌트는 이스라엘의 법정 '정의의 집'에서 진행된 아이히만의 재판과정을 기록하고 신문에 기고한 글들로 출판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말미에 아이히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그는 단지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결코 깨닫지 못한 것이다. -중략- 그는 어리석지 않았다. 그로 하여금 그 시대의 엄청난 범죄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되게 한 것은 (결코 어리석음과 동일한 것이 아닌) 순전한 무사유 (sheer thoughtlessness)였다. " (페이지 391)

     

    그를 무사유의 존재로 만든 것은 사랑의 결여, 타인에 대한 연민의 결여였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덧붙여, 한나 아렌트는 아이히만에겐 서로 긴밀히 연결된 세가지 무능성을 언급하였다. 

    "그의 말을 오랫동안 들으면 들을 수록, 그의 말하는 데 무능력함 (inability to speak)은 그의 생각하는데 무능력함 (inability to think), 즉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데 무능력함과 매우 깊이 연관되어 있음이 점점 더 분명해진다. 그와는 어떠한 소통도 가능하지 않았다. 이는 그가 거짓말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말(the words)과 다른 사람들의 현존(the presence of others)을 막는, 따라서 현실 자체 (reality as such)를 막는 튼튼한 벽으로 에워싸여 있었기 때문이다." (페이지 106) 

     

    아이히만이 이스라엘 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이 세상에서 사라진건 1962년, 반백년이 넘었다. 당시 재판은 '악의 평범성'이란 개념을 세상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고, 악이란 특정한 사람들이 행하는 것이 아님을 인류에게 각성시킨 사건이었다. 더러 심리학, 정신분석 적으로 아이히만을 '소시오 패스'라고 하며, 그것은 뇌 구조상 타고난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지만, 나는 악이란 특정한 인물에 의해 서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인물 안에 쉽게 깃들수 있다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평범한 우리 인간들이 계속 이 지구에 남아 있는 한, 인류문명의 발전과는 상관 없이 평범한 우리 안으로 악은 언제든지 깃들 수 있고 타인을 향하여 무자비하게, 때론 그 악에 기여하는 도구로 사용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반백년 전 아이히만은 현재의 우리 중 누구라도 될 수 있는 것이다.

    우리 평범한 개개인은 타인으로 인해 완성되는 불완전한 존재들이다. 타인과의 연결은 말, 그 말은 우리의 생각하기에서 나온다. 말은 우리의 사고를 현실에 타인에 전달해 준다. 결국 돌고 돌아 타인에게 전달된 나의 말이 타인의 운명을, 결국 나의 운명을 결정한다고 뜬 구름 잡는 이야기 같지만 나의 결론은 그러하다.

    한나 아렌트도 사랑이 결여된 평범함이 악에 기여하는 과정을 세기의 재판을 통해  독자에게 알려 주고 싶었던 게 아닐까 감히 넘겨 짚어보며, 그녀의 말을 아래와 같이 인용해 본다.

     

    "어떠한 인간의 삶도, 자연 속 광야에서 살아가는 은둔자의 삶조차도, 다른 인간의 현존을 직간접적으로 입증해 줄 수 있는 세계가 없다면 가능하지 않다" (페이지 29) 

     

    피곤한 일이라 회피하지 말고 생각하기를 게을리 하지 말아야겠다. 내 마음밭에 좋은 글과 사상을 갈아 넣어 생각하고, 사랑의 밑천으로 삼어야겠다. 타인에게 사려깊은 언어로 소통하는 생활을 잊지 말자. 평범하면서도 선한 삶을 사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란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평범한 개인인 나는 세상의 선을 이루는 열일하는 작은 톱니바퀴로 쓰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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