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는다. 그림을 그린다. 그리고 글을 쓴다. 이와 같은 행동을 통해 나는 가끔 내 내면에서 일어나는 어두운 폭동을 잠재우곤 한다. 그러나 늘 그것을 잠재울 수 있었던 건 아니다. 때때로 진압에 실패하여 아이들을 향해 야수처럼 고함을 내지른다. 또, 분노로 인해 피도 눈물도 없는 결론을 상상하다가 화들짝 정신 차리곤 내가 짐승과 다를 바 없음에 비참해 진다. 주로 육아문제나 인간관계의 갈등에 빠져 거친 화가 이는 바로 그 때 내 심연 깊이 있는 것이 모성과 연민이 아닌 파괴와 힘의 추구임을 직면한다. 그것은 나에게 참 괴롭고 슬픈 일이다. 스스로 그 위기를 모면하려 책의 페이지를 들추고, 붓을 들어 그림을 그린다. 아니면 이렇게 글을 쓰거나. 그렇게 하루하루 우아하게 버텨보려 노력한다.
‘인간지성의 기원을 찾아서‘.표지에 자리 잡은 이 슬로건대로 <코스모스>의 저자 칼 세이건이 인간진화의 궁금증을 뇌 과학으로 풀어낸 책이 <에덴의 용>이다. 오랜 시간 나의 서가에 꽂혀 있었지만 선뜻 손이 가지 않았던 것은 이해가 어려울 것이란 과학책에 대한 편견 때문이기도 하지만 내 생활과 고민에 큰 관련이 없을 것이라 여긴 탓도 있었다. 그러나 한두 살씩 나이를 먹어가다보니 세상에 화나는 일이, 분노가 일어 내 밑바닥까지 이성이 추락하는 일이 빈번해져 도대체 나란 인간은 어떤 존재인지 궁금해지는 것이다. 나를 알기 위해 인문학책을 꾸준히 들춰 보았지만 ’나는 어디서 왔으며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라는 철학자에게 들을 수 있을 것만 같은 의문의 답을 결국 과학책을 들춰 찾고 싶은 날이 지금 나에게 온 것이 신기하다. 결국 표지의 그 문구 때문이다. 인간지성의 기원을 들여다보면, 나는 어디로부터 왔으며 어느 방향으로 좌표 찍고 나아가야 할지 알 수도 있지 않을까? 밑바닥의 나를 괴롭게 보지 않고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우주의 미세한 그러나 엄청난 먼지 우주의 탄생부터 지금 현재까지를 1년의 시간으로 단축하여 달력을 만든다면, 인간의 조상이 출현하여 문명세계를 이룩한 시기가 고작 12월 31일 오후 1시부터 11시 59분 59초 사이의, 반나절도 안 되는 시간이라고 한다. 인류는 저 드넓은 우주에서 너무나도 어린 존재인 것이다. 어디 시간뿐인가, 광활한 우주에 한 점 티끌보다 작은 존재인 우리여서 크기로 보나 연차로 보나 인류라는 존재-그 중의 하나인 내 자신이 한없이 나약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그 반나절도 안 되는 시간동안 우주의 티끌 정도도 안 되는 인류는 엄청난 진보를 이루며 지구 밖으로 나가기 시작하였고, 또 동시에 미친 속도로 지구 생태계를 오염시키고 있다. 수많은 생명체 중 유일하게 자신을 아우르고 있는 우주를 대상으로 벌이고 있는 인류의 황홀한 진보와 우려스러운 파괴 행위들은 거듭되는 진화를 통해 얻게 된 우리 신체에 비해 ‘크고 무거운 뇌‘ 덕분, 아니 때문에 가능했다고 한다.
사람 안에 있는 포유류, 그리고 파충류 우리의 먼 조상이 파충류라는 사실은 학창시절 과학시간에 주워들어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이 책에선 사람이 ‘삼위일체의 뇌’를 얻게 된 진화론적 근거와 과정을 설명하고 있는데, 우리의 뇌는 먼 조상인 파충류의 뇌 ‘R복합체’, 포유류의 뇌인 ‘변연계’, 그리고 추상능력을 관장하는 뇌인 ‘신피질’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이 세부분은 각각 ‘고유의 특별한 지능과 감각, 기억과 운동 능력 등 온갖 기능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따로 놀며 우리의 사고에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니라 긴밀하게 연결된 신경세포들이 협응하여 우리생활에 관여한다. 진화가 이뤄질 수록 신피질이 더욱더 발달되는데 인간뿐만 아니라 고등포유류인 돌고래와 영장류 등도 뇌에서 이 부분이 차지하는 비율 역시 크니 우리만 똑똑하다고 여겨선 안될 문제다. 또, 진화가 기존 조직의 기능은 그대로 보존한 채 새로운 조직이 부가되는 식으로 이루어지는데 그 이유는 새로운 기능 뿐 아니라 오래된 기능도 생존을 위해선 계속 필요하기 때문이다. 우리 인류가 가지고 있는 공격적 행보, 영토 본능, 서열의 형성 등이 파충류 뇌의 특징이라고 하니 도마뱀을 바라보며 우리의 멀고 먼 조상을 떠올리게 되면서 동시에 우리 본능을 부정하지 않고 직시하게 된다. 파충류의 뇌를 둘러싼 변연계는 강렬하고 생생한 정서를 불러일으키는 영역이라고 하는데 흔히 예로 드는 것이 이 영역을 이타적인 뇌, 그래서 포유류의 뇌라고 한다. 연민, 보호본능 등을 관장하니 영장류나 고등 포유류들이 새끼를 보호하고 기르는 모습이 파충류와는 확연히 다를 수 밖에 없는 이유가 확실해 진다. 신피질이 인간 특유의 인지적 기능의 상당부분을 담당하고 있다는데 추상하고 예측하는 등의 이성적 활동과 연결되어 진다. 현재 인간의 삶들에서 벌어지는 사건 사고들의 면면을 살펴 볼 때 문명은 고도화 되었고 과학은 진보했지만 대중의 이성이 잠들어 있는 상태라면, 인간이라는 개체는 파충류의 후예임이 자명하다. 우리 안의 파충류, 포유류, 인류. 어떤 뇌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는 엄연히 우리의 선택인 것이다.
이성은 어떻게 사용되어야 할까? 성경을 포함한 신화에서 사과를 따먹은 이브, 불을 가져다 준 프로메테우스 등의 이야기의 메타포로도 다뤄진다. 이야기가 말하고자 하는 건 인류가 문명을 구축할 수 있게 된 결정적 계기는 판단능력, 즉 인지능력을 얻게 되면서 부터라는 것이다. 네발로 걷다가 두발로 걷고, 손을 사용하여 도구를 만들게 되고, 집을 지어 몸을 보호하며 음식을 불에 익혀 먹으며 오래 생존할 수 있는 가능성을 높이게 된 진화의 과정 안에서 인류의 뇌는 폭발적으로 성장하며 커졌고 무거워졌다. 또, 언어를 사용하고 문자를 남기고 우리의 진보된 문명을 후대에 남길 수 있게 되었다. 모든 생명체를 통틀어 인간만이 가지게 된 이 고유의 특징은 우리가 신에게 선택받은 특별한 존재여서가 아닌 모든 생명체가 가지고 있는 살아남기 위한 과정의 진화 과정 중 파생된 한 종의 결과로서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가 직관이라 여기는 것도 먼 조상의 DNA에서 우리의 DNA까지 오랜 여행을 통해 쌓인 학습 누적의 결과라고 하니 말이다. 인간의 뇌는 좌뇌와 우뇌로 나눠져 서로 협응한다. 좌뇌는 현상을 탐구하고 연구하며 통계하는 뇌, 우뇌는 감각의 뇌다. 직관이 이 우뇌에서 이뤄지며 좌뇌가 인간스러움에 가까운 이성활동들을 처리하는 것이다. 좌뇌의 활동으로 인간의 사고가 더 세밀해지고 논리적이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우뇌가 좌뇌의 논리를 위해 안전과 생존의 가능성을 더불어 가늠해 주기 때문이다. 좌뇌가 인간의 기능을 온전히 해내려면 우뇌의 뒷바라지가 필수적이다. 뇌가 잘 협동해야 한다. 어찌됐든 우리가 이런 고도화된 뇌를 사용하게 된 것도 과거 지구 최상위 포식자였던 공룡이 여러 가지 가설이 분분하지만 어찌됐든 대멸종한 것이 큰 계기였다. 그 이후 포유류는 생존의 가능성이 더 높졌고, 포유류는 여러 생명체로 진화하는 과정에서 인류도 그 혜택을 보게된 셈. 적자생존의 공식에 의해 인류가 특별한 생명체로 거듭닸다기 보단, 신의 선택이라기 보단 살아남아야겠다는 모든 생명체가 가진 공통의 일념으로 기타 종으로 어쩌면 생존했을지도 모를 다른 Homo족의 싹을 파괴하는 과정을 거쳐 지금 인류가 존재하게 된 것이라고 한다. 하많은 세월의 그 뿌리들이 생존과정을 상상하다보면 겸손함, 겸허함이 절로 생긴다. 우리의 뇌 안에 존재하는 기나긴 진화의 흔적들을 대하며 우리가 얻게 된 신피질의 특징, 추론하고 사고하는 능력 ‘이성’을 어떻게 이 세상을 상대로 다루어야 하는 고민이 든다.
이성의 힘을 타 생명체를 이해하는 힘으로 책을 보다보니, 우리 사람이 오해하며 사는 것이 많다는 것, 그것의 결정적인 이야기는 ‘언어’였다. 영장류들에게 인간의 언어를 교육시키는 과정을 보며, 인간은 인간만의 방법에 갇힌 것이 아닐지 생각이 든다. 결국 영장류도 영장류만의 소통 방법이 있고 학습하며 후세에 전달할 수 있는 그들만의 언어가 있고, 오히려 인간이 이들과의 연결통로를 잃었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책에서 접하며 우리는 인간만이 사고한다는 시각에 갇혀 더 넓은 세계를 볼 수 있는 기회를 놓치는 것은 아닐지. 시작에서도 말했지만, 무한한 우주의 우리는 티끌이다. 인류의 조상들로부터 지금 우리에 오기까지 우리의 DNA 안에 함께하는 긴 여정, 수많은 생명체들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만의 특징이라고 단정지은 이성의 특질들이 거저 얻어진 것도 아니다. 그들과 함께 걷고 성장하다 각자 다른 선택지를 두고 멀어진 것일 뿐. 말할 줄 아는 능력에 사로잡혀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은 보이는 것보다 많을지도 모른다.
직면과 포용 지난 수세기 동안 우리는 많은 것을 이뤘지만, 또 많은 것을 잃고 있다. 제대로 돌아가는 세상은 아닌 것 같다. 인류의 어떤 한 축을 바라보면 우리를 포함하여 세계를 완전히 파멸로 몰아가진 않을지 걱정된다. 우리 안의 파충류를 확인하게 된다. 우리 뇌 안의 파충류와 포유류의 부분과 더불어 인간적인 부분을 통합하여 꽃피울 수 있는 세계가 요원하다. 여러 생태계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의 시작은 우리의 과거를 과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부터 시작해야겠다. 저자는 그것을 우리의 인격을 떨어뜨리는 사실이 아닌, 오히려 과학이며 물질과 자연의 법칙의 미묘함, 신비함을 인식하는 고무적인 것이라고 이야기 한다. 나 역시 이 부분을 겸손히 받아들이고 싶다. 신이 우리를 탄생시켰다는 사실이 아닌 우리도 다른 생명체와 같은 이 지구의 하나라고. 우리가 진화를 통해 얻게 된 ‘이성‘을 모든 생명체와 우리를 위해 사용해야 하는 것 역시 받아들여야 할 부분이라고 말이다. 인간적인 것은 우리가 무수한 폭력과 생존의 과정, 그 진화 과정을 통해 얻게 된 산물이다. 인간적으로 살아야 하는 것은 인류로서 우리가 온 우주의 생명체에를 위한 의무라고 말하고 싶다. 저자도 이야기 한다. 신피질의 완전한 기능을 통해서만 밝은 미래로 나아갈 수 있음은 너무 확실하다고 말이다.
아이들 보육과 가사일에 찌들어 별일 아닌 일에 분노하는 나를 오늘 또 만난다. 오싹하게 만드는 내 안의 폭력성, 잔인함을 잠재우려 인류의 문화라고 일컫는 것들을 소비한다. 나의 신피질이 그때 작동하겠거니 안도를 느낀다. 그러나 무엇보다 책을 읽은 후에, 나라는 몸 안에 있는 기나긴 진화의 역사를 들여다본다. 내 안의 파충류, 포유류, 그리고 인간. 잔소리 백마디에도 말 안듣는 아들의 뒷통수를 바라보다 문득, 공격본능이 불끈 치솟아 오르는 상황이 온다면. 저 뒷통수 한 대 거하게 치고 싶다 상상하다 화들짝 정신 들더라도 죄책감에 사로잡혀 우울해 하지 말자. 그때 내 좌뇌의 협력을 구하리. 그리고 책을 꺼내들자. 우하하게. 내 안의 파충류야, 너를 이해해. 그러나 지금 우리는 책을 읽으며 포용하고 앞으로 나아가자꾸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