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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331] 3일_민들레의 시간100일 내 방으로 출근합니다 2021. 3. 31. 21:12
우리는 봄에 피는 어여쁜 꽃들을 보며 지리멸렬한 일상사를 잠시 잊고 아름다운 한 순간을 음미한다. 매일이 헌 날 같이 돌고 도는 삶을 살지만 이 계절의 꽃들이 망울을 터 색색의 공기가 천지를 휘감으면 봄과 함께 새 날을 살고 있음을 깨닫곤 한다. 봄에 피는 꽃들은 그래서 참 어여쁘고 고마운 존재다. 100세 시대를 사는 지금 인간의 시간으로 치면 봄꽃들의 삶은 짧다. 벚꽃은 만개 한 뒤 금새 봄비에 섞여 땅과 하나가 된다. 민들레는 그 보다는 오래 가지만 늦봄에 노오란 빛깔은 금새 하늘로 떠오르는 눈송이가 되어 비행을 시작한다. 같은 나무에서 움텄다 해도 작년에 핀 꽃과 올해 핀 꽃은 다른 아이일 것이다. 공터와 난 자리가 같다고 작년의 그 민들레가 올 해의 그 민들레가 아닐 것이다. 봄에 피는 꽃들에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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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330] 2일_하다보면100일 내 방으로 출근합니다 2021. 3. 30. 14:26
하다보면 나도 언젠가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글과 그림으로 엮어 책을 만드는,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문제는 늘 생각 뿐이라는 거. 작정하고 앉아서 빈 노트를 바라보는 날이 대부분이다. 또, 호기롭게 시작해 놓고 중간에서 길을 놓친 이야기들이 내 노트북 안에 여러 파일로 존재한다. 완결되는 그 날이 과연 올 지 확신이 없다. 글쓰기 모임에도 나가봤지만 내 용기와 의지의 문제로 늘 용두사미. 내 자신의 결과물에 만족하지 못하는 내 성향의 문제도 크지만, 내가 나의 것을 생각하듯 다른 이들 역시 나의 것에 그럴까봐 두렵다. 타인의 논평을 무서워 하는 내 자신의 두려움이 나에겐 가장 넘기 힘든 장벽이다. 그것을 너무 의식하다 보니 종이만 쳐다보게 되는데, 그 시간이 너무 길어지지 않았으면 좋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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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훌 잔디얼 <내가 처음 뇌를 열었을 때>나의 서재/독서 후기 2021. 3. 29. 17:49
라훌 잔디얼이란 이름의 미국 신경외과 전문의이자 신경과학자의 저서로 작년 겨울에 번역출판된 책이다. '뇌'를 다루는 의사, 아이들 둔 아빠, 그리고 전공의가 되기 전 청년시절까지 저자의 인생과 뇌에 관한 이야기들을 책 안에서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 낼 수 있었다. 이 책의 문체는 무척 친근하다. 전문 용어 의미 파악하느라 시간을 꽤 할애해야 하는 과학-의학 책이 아니라 참 다행이었다. 일상 생활 속에서 우리가 늘 사용하는 뇌의 건강을 어떻게 관리하면 좋을지에 대한 안내서로도 유용하다. 내가 인터넷에서 처음 이 책의 제목을 접했을 때 늘 소화되지 않고 내 안에 답답하게 자리하던 궁금증의 해답지를 발견한 것 마냥 동공이 눈 한가득 펼쳐졌다. 설레임 가득 망설임 없이 구매하기 버튼을 눌렀다. 나를 늘 골몰하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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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329] 내 방으로 첫 출근합니다100일 내 방으로 출근합니다 2021. 3. 29. 14:50
남편과 아이들이 회사며 학교 일로 바쁜 평일, 나 역시 집안 일로 보통은 바쁘다. 주변 머리 없는 사내 아이들을 키우다 보니 뽈뽈 거리고 집안을 돌아다니며 정리를 해도 금새 개꼴이 되곤 하니까 말이다. 해도 티 안나는 집안 일을 하다 보면 어느새 하루가 간다. 그러던 어느날, 두 아이의 대면수업일이 겹쳐, 나를 제외한 온 식구가 밖으로 나간 날 혼자 남은 내 신발을 바라보다가 문득 쓸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족의 잠시 부재로 느끼는 쓸쓸함이 아니라, 내가 해야하는 '업무'가 집안 일로 꽉 차 있다는 사실이 나를 쓸쓸하게 만들었다. 신발을 신어야 하는 날, 신발을 신지 않는 날도 나는 늘 바쁘지만 말이다. 바쁘게 시간이 흘러 저녁 설거지를 하다 보면 내 속이 점점 비어가는 것인지 가슴 안에서 덜그럭 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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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적응을 위한 그리기사는 이야기/Sing-Life 2021. 3. 5. 13:37
싱가포르에서 다시 한국으로, 그때가 올 1월 말이었는데 벌써 3월이다. 아이들은 새 학교와 새 동네가 아직은 어색하지만 설레이고 기대되는 마음이 큰 것 같다. 싱가포르에서 우리 가족보다 먼저 출발한 짐들이 2월 중순 경 도착을 했고, 2주가 지나서야 덩그러니 네 식구 뿐이어서 황량 했던 지금 집은 사람 사는 공간으로 꽉 채워진 느낌이다. 사람 사는 느낌이란 게 사람과 물건과 함께 있어야 풍길 수 있다니... 그나저나 짐 정리의 가장 큰 난관은 그동안 내가 그린 그림들, 그리고 미술 용품들. 지금 새로 얻은 이 집은 면적도 그 전들 집 보다 작고 수납 공간도 부족하다. 이삿짐 박스를 풀면서 물감과 캔버스, 붓, 이런 저런 그리기 용품들을 이렇게 많이 사 모았나 싶을 정도이고, 그간 그려둔 그림들을 바라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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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세이건 <에덴의 용>나의 서재/독서 후기 2021. 2. 1. 22:50
책을 읽는다. 그림을 그린다. 그리고 글을 쓴다. 이와 같은 행동을 통해 나는 가끔 내 내면에서 일어나는 어두운 폭동을 잠재우곤 한다. 그러나 늘 그것을 잠재울 수 있었던 건 아니다. 때때로 진압에 실패하여 아이들을 향해 야수처럼 고함을 내지른다. 또, 분노로 인해 피도 눈물도 없는 결론을 상상하다가 화들짝 정신 차리곤 내가 짐승과 다를 바 없음에 비참해 진다. 주로 육아문제나 인간관계의 갈등에 빠져 거친 화가 이는 바로 그 때 내 심연 깊이 있는 것이 모성과 연민이 아닌 파괴와 힘의 추구임을 직면한다. 그것은 나에게 참 괴롭고 슬픈 일이다. 스스로 그 위기를 모면하려 책의 페이지를 들추고, 붓을 들어 그림을 그린다. 아니면 이렇게 글을 쓰거나. 그렇게 하루하루 우아하게 버텨보려 노력한다. ‘인간지성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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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흐르는 시간 속에서사는 이야기/Sing-Life 2020. 12. 14. 22:31
1년의 시간들을 되돌아보게 되는 12월이다. "얘야, 여긴 귀가 다 떨어져 버릴 정도로 춥다." 시어머니가 수화기 너머 들려주는 한국의 한파 소식은 마치 동화 속 눈나라, 겨울나라 이야기 처럼 멀리 느껴진다. 그러나 곧 1월, 비행기를 타고 그곳에 가게 된다. 그러면 늦겨울의 폭설, 그리고 곧 봄을 질투하는 꽃샘추위를 몸소 체험하며 나도 그간 봉인되어 있던 싸한 기운의 추억을 꺼내어 새로이 적응해 나갈 것이다. 생각만으로도 목덜미 뒤 찬 바람이 싸늘하게 지나가 어깨가 움찔 거린다. 싱가포르는 1년 내내 여름이다. 온도와 습도의 변화는 하루하루 대동소이 존재하지만 그뿐. 가끔 미친듯이 쏟아지는 비에 몸이 으스스 떨려 얇은 가디건을 걸치기도 하지만 결국 1년 내내 덥다. 집 앞 산책로의 꽃들은 처음 조화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