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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하림 <바람이 이는지>나의 서재/시 담기 2020. 12. 13. 23:45
바람이 이는지 나무들이 한 방향으로 흔들리고 있다 몇 줄의 기억과 사유의 마디마디들이 달그락거리면서 창 유리에 달라붙고 부질없는 시간들도 성에처럼 앞을 가린다 새들이 날기를 멈추고 어둠 속으로 들어간다 나그네들이 검은 여인숙으로 들어간다 나는 블라인드를 걷고 불 켜진 창을 본다 겨울의 흰 산과 산 사이로 눈을 감고 오래도록 걸으면 우리는 물을 볼 수도 있으려니 눈물 흘리지 않아도 고요에 이를 수 있으려니 오오, 벌판에서는 아직도 눈이 매리고 띄엄띄엄 버드나무들이 흔들리고 그림자 같은 것들이 급류를 이루면서 흘러가고 있다 어느 지방에서는 별이 돋아오르는지 하늘이 높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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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자 <생각은>나의 서재/시 담기 2020. 12. 11. 06:47
생각은 마음에 머물지 않고 마음은 몸에 깃들이지 않고 몸은 집에 거하지 않고 집은 항상 길 떠나니 생각이 마음을 짊어지고 마음이 몸을 짊어지고 몸이 집을 짊어지고 그러나 집 짊어진 몸으로 무릉도원 찾아 길 떠나니 그 마음이 어떻게 천국을 찾을까 무게있는 것들만 데불고 보이는 것들만 보면서, 시야에 빡빡한 그 형상들과 그것들의 빽빽한 중력 사이에서 어떻게 길 잃지 않고 허방에 빠지지 않고 귀향할 수 있을까 제가 몸인 줄로만 아는 생각이 어떻게 제 출처였던 마음으로 귀향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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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일리치 <텍스트의 포도밭>나의 서재/독서 후기 2020. 12. 8. 11:16
이란 책을 집어 든 것은 '나는 왜 읽는 걸까?'에 대한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한 것이었다. 주석을 제외하면 190여 페이지, 본문의 양 만큼 뒤에 딸려있는 주석 부분을 보았을 때 차마 예상하지 못했다. 이해를 위해 고심할 것도, 찾아볼 것도 많아 한달이란 기간 읽는 다는 것이 매우 촉박하다는 것을 말이다. 그저 책 한권일 뿐인데 말이다. 성직자이자 작가인 이반 일리치의 이 책은 유럽에서 알파벳으로서의 표음문자가 개발되기 전, 라틴어가 텍스트의 기본이 되던 시기, 수사들의 읽기를 주요하게 다룬다. 또, 후반부에선 표음문자가 개발된 후 종이의 보급, 대량인쇄의 발달로 '책'의 개인소장의 시대가 열리면서 텍스트를 구하고 이해하고자 하는 목표의 변화에 대해 논한다. 책의 여정에 12세기 이전의 인물인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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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읽고나의 서재/독서 후기 2020. 11. 6. 10:07
나는 가끔 사람들과의 만남 후 집에 돌아와선 내가 사용한 어휘나 행동 중에 사람들에게 상처가 될만한 게 없었나 반성하곤 한다. 혹여, 그런 게 있었다고 판단되면 혼자 속앓이를 끙끙하며 속상해 한다. 이런 죄책감이 나의 안식을 위해서 일수도 있겠고, 다른 사람에게 상처와 아픔을 준것에 대한 미안함 때문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두 가지 다 어찌 되었든 우리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에 타인과 나의 관계맺음에서 따라오는 자연스러운 공생의 증명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된다. 지금 세계 여기저기서 터져나오는 테러, 살상, 인종차별, 그리고 과거에 행한 국가적 만행을 반성하지 않는 태도 등을 뉴스에서 접하다 보면 사람 안에 미움이 이렇게 가득했나 생각이 든다. 나 같이 말 한마디 실수에 밤 잠 못이루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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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안 <입춘>나의 서재/시 담기 2020. 2. 27. 11:27
김 안 이념도 없고 분노도 없는 계절이 왔다. 마음이 질겨서 봄이다. 이제 나는 한 줄로도 만족하게 되었다. 한 줄만큼의 어리석음이면 족하다. 그 정도의 망신이면 족하다. 부끄러워서 봄이다. 까마득한 크레인 위에서 겨우내 사람들이 얼어갔고, 젊은 청년들이 자꾸 죽었지만, 친하지도 않은 이들과 어깨 겯지르고 같이 취해 나뒹굴며 황망하게 흘러 다니다 보니 남편이 되었고 아빠가 되었고 사무실에 앉아 버려져 가는 반쪽짜리 노동이 되었다. 나는 버려지기가 무서운 것일까. 그래서 착한 척이나 하는 것일까, 하다가 그저 밤 늦도록 취하게 좋으니 봄이다. 가끔 술에 취해 전화하는, 지금은 꽤 잘산다는 친구를 생각한다. 그 친구의 꿈은 아직 시인일까? 내가 생각한 것은 이따위 것이 아니었다. 나나 그 친구나 포즈만을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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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규원 <봄>나의 서재/시 담기 2020. 2. 21. 21:08
오규원 저기 저 담벽, 저기 저 라일락, 저기 저 별, 그리고 저기 저 우리집 개의 똥 하나, 그래 모두 이리 와 내 언어 속에 서 라. 담벽은 내 언어의 담벽이 되고, 라일락은 내 언어의 꽃 이 되고, 별은 반짝이고, 개똥은 내 언어의 뜰에서 굴러라. 내가 내 언어에게 자유를 주었으니 너희들도 자유롭게 서 고, 앉고, 반짝이고, 굴러라. 그래 봄이다. 봄은 자유다. 자 봐라, 꽃피고 싶은 놈 꽃피고, 잎 달고 싶 은 놈 잎 달고, 반짝이고 싶은 놈은 반짝이고, 아지랑이고 싶은 놈은 아지랑이가 되었다. 봄이 자유가 아니라면 꽃피 는 지옥이라고 하자. 그래 봄은 지옥이다. 이름이 지옥이라 고 해서 필 꽃이 안 피고, 반짝일 게 안 반짝이던가. 내 말이 옳으면 자, 자유다 마음대로 뛰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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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준경 <은행나무 연가>나의 서재/시 담기 2020. 2. 20. 20:35
윤준경 우리 집 은행나무는 혼자였다 아무리 둘러봐도 짝이 없던 은행나무는 연못 속에서 짝을 찾았다 그것이 제 그림자인줄 모르고 물 속에서 눈이 맞은 은행나무 물에 비친 제 그림자에 몸을 포개고 만 명도 넘게 아기를 가졌다 물방개는 망을 보고 연잎은 신방을 지켜주었다 해마다 가지 사이에 돌멩이를 얹고 그림자에게 시집 간 은행나무 한가마니씩 은행이 나와도 그것이 그리움의 사리인줄 몰랐다 바람이 세게 불 때마다 연못이 걱정되는 은행나무는 날마다 그 쪽으로 잎을 날려 보내더니 살얼음이 연못을 덮쳤을 때 은행잎은, 연못을 꼭 안은 채 얼어있었다